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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같은 찬란한 순간(에세이)

할머니는 TV 속 글자를 따라 읽으셨어

by 해 니 2021. 1. 24.

 학교를 다녀와서 대낮에 할머니와 TV를 보고 있노라면 할머니는 TV 속 글자를 따라 읽기 바쁘셨다. 큰 글자, 작은 글자 할 거없이 모두 읽어내려가셨다. '할머니는 왜 매일 중얼거리실까' 라고 어린 마음에 궁금했다. 성인이 되고서야 아빠에게 전해 듣기로 할머니는 시골에서 자라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문화센터같은 곳에서 뒤늦게 한글을 배우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족들도 모르게 다니셨고 아빠가 알게된 것도 한참 후였다. 

 

 할머니는 지금도 휴대전화가 잘 안터지는 시골 장녀로 태어나 '맏딸은 살림밑천인데 무슨 학교냐'며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집안일만 하셨다. 애닳프게도 할머니는 '거름손'이셨고, 빌라 옥상에서 병아리를 닭으로 키울만큼 농사에 능통하셨다. 할머니 집은 3층짜리 작은 연립주택이었는데 내가 5살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 함께 살았다. 그때만해도 옥상을 자유롭게 드나들때라 할머니는 옥상에 자신만의 작은 텃밭을 일구셨다. 붉은색 큰 다라이에 고추가 자라고 있었고, 날씨 좋은 날에 할아버지가 옥상에 텐트를 쳐주시고 할머니는 '간장계란밥'을 해서 내게 점심을 주셨다. 할머니는 '해니가 얌전해서 옥상에서 낮잠 재워도 걱정이 안된다'는 말로 엄마를 안심시켰지만 엄마는 늘 불안해했던 것 같다.

 

 삼촌이 결혼하기 전이었으니 참 작은 집이었는데 일곱 식구가 몇 년을 치대며 함께 살았다. 더운 여름날 밤 온 식구가 올라가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수박을 잘라 먹었다. 빌라 바로 옆동 옥상에 올라온 사람들과 대화가 들릴 정도로 옹기종이 모여있는 작은 동네였다.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사와서 할머니와 옥상에서 키웠다. 어느날 큼지막하게 커버린 병아리(닭이라고 하는게 맞겠다)가 옥상에서 보이지 않아서 집에 내려와 물었더니 할머니는 비둘기가 잡아갔다고 했다. 성인이 되서 추억을 곱씹다보니 그 날 집에서 닭을 삶아 먹었던 것 같았다. 뒤늦게 물어보니 그 병아리는 내 뱃 속에 안식했다.(자세히 어떻게 잡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할머니의 부지런함에 맞춰 옥상은 항상 바빴다. 특히 한여름마다 고추를 말리던게 참 기억에 많이 난다. 그만큼 할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한 해도 빠짐없이 고추를 말렸다. 고추 말리는게 여간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밖에서 먹는 고추는 독약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셨고, 물론 시골에서 자란 할머니도 고춧가루는 당연히 직접 말려서 먹는 것이었겠다. 군대에서 보초서듯 고추 말리기에 온통 신경을 세우는 여름이었다.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리면 할머니랑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얼른 걷었고, 중간에 고추를 뒤집어주기도 하고 온 가족이 둘러 앉아 하나씩 닦아주었다. 요즘은 보기드문 풍경이지만 우연히라도 고추말리는 풍경을 보면 그때가 참 아련하고 할머니가 많이 그립다.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인지 부침개, 떡을 좋아한다. 간식으로 감자전을 자주 해주셨고 어렸을 때에는 면도 직접 뽑아서 칼국수를 해주셨다. 명절마다 만두, 송편을 직접 빚었다. 김장은 물론이다. 자라면서 모든 것이 귀찮아져서 사먹는게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한번도 직접 빚어본 적 없다. 정월 대보름이면 항상 찰밥을 해주셨는데 아빠랑 내가 잘먹었다. 도토리묵을 직접 쑤어서 간장에 찍어먹었는데 할머니 간장은 갖은 재료가 들어가서 일품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때마다 챙겨먹는 음식, 그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다. 할머니와 떨어져 살고 난 후에도 할머니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음식을 잔뜩 챙겨주셨다. 할머니가 집으로 오신다고해서 버스정류장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딱 봐도 무거워보이는 가방을 짊어지고 오셨다. 집에서 직접 갈아서 만든 콩국물을 페트병에 넣어 가져오셨다. 할머니 콩국물은 어찌나 찐한지 물을 조금 타서 먹을 정도였다. 하루 세끼를 모두 콩국물을 먹을 정도로 좋아했었는데 할머니가돌아가신 후로는 맛보기가 어렵다. 때마다 챙겨먹는 음식이 보일 때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이렇게 빈자리를 느끼나보다.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허리 수술을 두번이나 하셨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안방에 항상 누워있는 시간이 길었다. 회복 후에는 새벽, 저녁으로 꾸준히 운동하시면서 건강을 되찾으셨다. 할머니집 앞에는 인천대학교가 있었는데 아침잠이 없는 할머니는 새벽 4-5시에 동네 친한 분들과 운동을 다녀오셨고 저녁에도 어김없이 인천대학교 운동장을 10바퀴정도 걸으셨다. 추운 새벽에 운동하는게 안 좋았던걸까. 할아버지와 함께 우리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집으로 가신 후 며칠 안되어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할머니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의식을 찾지 못하셨고 일주일만에 하늘로 가셨다. 가족들 모두 경황이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웠고 특히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처음 겪었다. 일요일에 할머니께 월요일은 회사를 가고, 화요일에 꼭 오겠다고 했는데 결국 나를 못보고 가셨다. 회사에서 병원을 가는 지하철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병원에 도착해 주저 앉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장례가 끝나있었다. 화장터에 다녀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참 추웠다. 너무 정정하신 할머니가 갑자기 떠나버리셨다. 의사는 할머니가 깨어나신다고 해도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거라고 했다. 허리 수술을 두번이나 겪고 당뇨약을 달고 사셨던 할머니는 더이상 아프고싶지 않으셨나보다. 할아버지는 한평생 함께했는데 잘가라는 말도 못했다며 슬퍼하셨다. 

 

 할머니와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 길이었던것 같다. 할머니가 창밖을 보며 "해니야 너는 저 새 처럼 훨훨 자유롭게 날아라"고 하셨다. 얘기를 들을 때는 몰랐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가슴에 참 많이 남는다. 시골에서 배움을 다 하지 못하고 살면서도 지병 때문에 고생하신 할머니가 손녀만큼은 자유로운 새가 되길 바라셨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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